시와그리고..

기일(忌日)../ 글, 박찬일

노을 그림자 2014. 1. 25. 22:45

 




기일(忌日)

1
산본역은 지상에 있고 을지로3가역은 지하에 있다.
똑같은 것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산본역에서도 떨어질 수 있고
을지로3가역에서도 떨어질 수 있다.
산본역에도 가기 싫고
을지로3가역에서도 내리기 싫다.
을지로3가역으로 돌아오기 싫다.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떨어지다 보면 늦는다.

2
나를 끌고 가던 손이 나를 놓아버렸다.
나를 끌고 가는 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것.
떨어져도 이제 할말이 없다.

3
을지로3가역에는 ‘푸른 思想’이 있다.
을지로3가역에서 떨어지면
푸른 사상이 나의 마지막이었던 것.
그녀는 진행 방향 오른쪽 두 번째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나서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버스를 많이 타고 다녔어도
버스가 마지막이었을 줄은 몰랐으리라.

4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집을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안전선 뒤로 물러서 달라고 할 것이다,
산본역에서는, 을지로3가역에서는...

詩/ 박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