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그리고.. 2218

떠도는 자의 노래/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서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서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지 모른다 ..

시와그리고.. 2011.05.13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용혜원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이 나이에도... 이 나이에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손등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이젠 제법산다는 것에 어울릴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어색한 걸 보면살아감에 익숙한 이들이 부럽기만 합니다모두들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나만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만 같습니다이젠 어른이 되었는데.. 자식들도 나만큼이나 커가는데.. 가슴은 아직도 소년시절의 마음이 그대로 살아있나 봅니다나이 값을 해야 하는데.. 이젠 제법 노숙해질 때도 됐는데.. 나는 아직도 더운 눈물이 남아 있어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시와그리고.. 2010.09.10

목마와 숙녀 / 박인환

목마와 숙녀 / 박인환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시와그리고.. 2010.07.31

목마(木馬)는 어디로 가고 / 박호영

살아 있을 때 지지리 가난하여 좋아하던 술도 맘껏 마시지 못했다고 술친구들은 그대의 광중에 조니 워커를 철철 부어줬다 담배도 몇십 갑을 던졌다 그리고 그대 몸 위에 흙을 뿌렸으나 그들 모두 돌아간 뒤 그대 분명 그 술에 취해 다시 차디찬 땅속을 비집고 나와 이승을 헤맸을 거다 여기저기 술집을 기웃거렸을 거다 바타비아로 갔는가, 포엠으로 갔는가, 목마처럼 화려한 꿈만 먹고 산 그대. 그러나 그대 갔다고 펑펑 우는 벗들을 보고, 외상술 불평 없이 줄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술집 마담을 보고, 짧은 삶의 미련과 한이 봄눈 녹듯 사라져 다시 망우리 무덤 캄캄한 속을 ‘세월이 가면’ 한 소절 부르며 들어갔을 거다. 외로움도 없이 넉넉한 웃음 지으며 들어갔을 거다..목마(木馬)는 어디로 가고 ..- 박호영 '세월..

시와그리고.. 2010.04.17

김정한의시집 '러브레타'중에서

당신 때문에 난 늘 아픔니다 당신을 만나서 아프고 당신을 못 만나서 아프고 당신의 소식이 궁금해서 또 아프고 당신이 아프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아프고 당신을 영 만나지 못할까 무서워 또 아픔니다 당신 때문에 하루도 안 아픈 날이 없습니다 이래 저래 늘 당신 생각 난 오늘도 당신 생각을 하며 하루를 살았습니다 아픈 하루를 살았습니다...김정한 시집 "러브 레타" 중에서 ♬..Richard Clayderman - MOON RIVER..

시와그리고.. 2010.04.11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 조병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잎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

시와그리고.. 2010.03.30

군대가는 날 - 정규훈 -

너를 보내고 나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여기, 저 빈 의자에서도 우리 기쁜 날의 추억이 가슴 솔솔이 저며올 거야. 네 놈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울고 나오더니 이젠 친 구랍시고 눈물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구나. 눈물은 슬플때 흘려서는 안되느니라… 눈물은 홀로 있을 때 흘려서는 안되느니라… 눈물은 그리움에 지칠 날까지 간직하는 것. 눈물은 호흡이 시작되는 깊이까지 감추는 것. 우리가 교정의 잔디를 온몸으로 삼켜버렸듯이 네가 푸른 제복에 쌓여 돌아오는 날, 우린 저 빈의자의 주인공이 될 거야. 푸른 산과 맑은 물, 커 다란 하늘과 싱그런 새소리를 몰고 올 너의 젊은 눈빛을 위하여 오늘 너에게 고백하마. 아끼고 아껴왔던 한마디를, 너를 사랑한다.. 군대가는 날 ..- 정규훈 ♬..Secret Gar..

시와그리고.. 2010.03.01

덤 / 김광림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지훈(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키다 만 하다 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덤 ..- 김광림

시와그리고.. 2010.01.29

나를 꼭 잊고 싶다면 ../ 김 정한

나를 꼭 잊고 싶다면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나를 꼭 지우고 싶다면한꺼번에 삭제 버튼을 누르지 마시고내가 보낸 메일을 한줄씩 지워 가시기를 ... 바라옵건데조금씩 천천히 지워 가시기를 ...그저, 당신에게 용서를 구 할 것이 있다면허락 받지 않고 당신을 사랑한 죄 밖에 없으니가끔씩 당신이 그리우면당신에 대한 기억 몇자락 만 이라도 몰래 끄집어 내어혼자 만 이라도 울고 또 울며 추억할 수 있게새털 만큼 가벼운 흔적 만 이라도 남겨 두시기를 ... 나를 꼭 잊고 싶다면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 - 김정한 에세이 중에서-.

시와그리고.. 2010.01.23